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인도 제국 (문단 편집) == 사회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6be3f63da37e69c48f49efaeef173fd6.jpg|height=25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main-qimg-e2ae720870226976c67a0686ba2e5e28-lq.jpg|height=25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britt-officer.jpg|height=250]]}}} || || '''{{{#FFF 인도인들의 시중을 받는 백인 상류층}}}''' || '''{{{#FFF [[콜카타|{{{#fff 콜카타}}}]] 시내의 모습}}}''' || '''{{{#FFF 인도인들을 부리는 영국 장교}}}''' || 인도 식민지 정복기에는 영국인들이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터번을 쓰고 등등 회유를 위한 노력도 했지만, 정복이 진행되자 슬슬 때려치우고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인도 제국 당시 인도 사회는 철저히 인종과 자산, 종교에 따라서 사람들이 구분되어 차별받던 시대였다. 이 계급 [[피라미드]]의 정점에는 영국 본토에서 파견된 백인 관리들과 상류층 귀족 사회가 존재했고, 그 아래에 [[매국노|영국에 충성하던 인도의 대지주들과 지방 토후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밑바닥에는 노동력과 세금을 착취당하던, 그리고 당시 인도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일반적인 인도인들이 있었다. 백인 상류계급들은 [[적산가옥|인도에 호화로운 유럽식 저택]]과 수많은 인도계 시종들을 거느리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즐겼다. 이들에 협력하는 극소수의 인도계 번왕 및 대지주들과 재력가들 역시 막대한 재산을 불리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을 누렸다. 물론 이들에게도 백인들에 비하면 차별 대우가 엄연히 존재했고, 은연중에 백인 관료들도 이들을 무시하는 등 똑같은 상류층 계급으로 취급받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비참하게 살았던 인도 [[농민]]들과 노동자들에 비하면 이들은 매우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사회의 하류층을 구성하는 인도의 농민과 노동자들은 매우 살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세금]]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영국 식민정부나 대기업, 혹은 지주들에게서 '월급을 받는 형식'으로 돈을 벌었다. 이같은 기형적인 구조는 농민들이나 노동자들이 정상적으로 경제활동을 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나타나면 안 되는 구조였다. 쉽게 말해 이들은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아니었으며, 영국이나 부유계급에게 예속된 [[노예]]에 더 가까운 위치였다는 것이다. 정부나 고용주들이 자신들이 생산한 물건들의 대부분을 떼가니 사람들은 극도로 가난에 시달렸고, 영양실조와 질병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영국인]]들이 소위 문명화를 실시한다는 명목으로 서구의 의료체계와 약들을 가지고 오면서 상황이 아주 약간 개선되기는 했지만, 의료기술의 혜택은 모두에게 동등하게 돌아가지 않았고, 서구식 설비를 갖춘 병원에서 제대로 진료받을 수 있는 이는 소수에 불과했다. 1911년의 인도의 평균 기대수명은 '''21세'''에 불과했고,[* 이는 매우 심각한 수치인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중이며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최악을 달리던 시기에야 이 수치를 찍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영국은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서서히 개선되어가고 있던 시기이다. 즉 영국 본토는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시작했는데(이것도 어디까지나 브리튼 섬 한정, 아일랜드 섬은 여전히 막장이었다.) 인도는 그 시절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는 것.] 전쟁으로 인해서 상황이 악화되었던 1946년 즈음에는 인도인 1명이 1년 동안 섭취하는 식량의 무게가 137kg 밖에 되지 않아 세계 최하위권을 달렸다. 특히 영국은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벵골]] 지방을 집중적으로 수탈했다. 세리들에게 서로의 실적을 경쟁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초고세율을 사람들에게 물리도록 시켰고, 농민이나 공장 노동자 할 것 없이 대부분의 생산품들을 [[약탈]]해가다시피 [[착취]]해버렸다. 이같은 경향은 아직 영국이 식민지 통치에 미숙했던 1700년대 후반에 그 절정을 찍었다. 게다가 이 당시 겹쳐서 일어난 '''[[벵골 대기근]]으로 인해서 당시 벵골 인구의 3분의 1이 그대로 증발해버릴 정도로 사회가 거의 무너지다시피 했다.''' 인도 제국은 다른 세리들을 여러 차례 보내거나 세금에서 거래비를 제하고 나중에 따로 세금을 매기는 등 교묘한 방식으로 농민들에게 이중과세를 물렸고, 당시 [[자본주의]]에 미숙했던 인도인들은 이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게다가 토지세 뿐만 아니라 의복세, 소금세 등 갖가지 명목으로 세금을 만들어 돈을 빨아들였고, [[영국]]이 부유해지는만큼 인도인들은 반대급부로 더욱 빈곤해졌다. 특히 한때 인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벵골 지방은, 얼마 가지 않아 인도에서 가장 가난한 지방으로 전락하고야 만다. 인도 제국이 이렇게 착취해서 뜯어낸 세금의 3분의 1은 인도에 쓰이지 않고 그대로 영국으로 보내졌다. 영국은 이를 이용해서 자국이 [[유럽]]이나 [[북미]]에서 벌이는 사업에 투자하는 등, 인도를 [[황금알을 낳는 거위]] 정도로 취급했다. 인도인들에 대한 영국인들의 범죄는 최소한의 처벌만을 받았다. 자신의 인도인 하인을 총으로 쏴죽인 영국인은 6개월의 징역형과 고작 100루피라는 벌금을 물었다. 반면 영국 여성에 대한 강간 미수로 잡힌 인도인은 20년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200여년에 걸친 영국 통치 기간 동안 인도인들을 살해한 혐의로 영국인이 처형된 사례는 고작 '''3건'''에 불과했는데, 반면 영국인들은 수 천명에 달하는 인도인들을 살해했고 그중 상당수는 제대로 처벌되지조차 않았다. 영국인이 인도인을 죽이는 건 언제나 '사고'였고 인도인이 영국인을 죽이는 건 죽을죄였다. 영국인 주인이 인도인 하인의 배를 발로 차죽였을때에도 인도인이 [[말라리아]] 때문에 비장이 비대해진 탓이라고 판결내리는 수준이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뭄바이 대학교 인도.jpg|width=100%]]}}} || || '''{{{#FFF 인도의 첫 근대적 대학인 뭄바이 대학교}}}''' || [[영국인]]들은 [[식민지]]를 더 확실하게 통치하고 [[매국노|말이 통하는 협력자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인도인]]들에게 교육을 시키는 데에 나름 관심을 쏟았다. 초반에는 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영어]]나 기본적인 글쓰기들을 가르치는 학당을 중심으로 서구식 교육을 했고, 1835년 당시에는 이 선교 학교들의 설치를 장려하면서 벵골에만 10만 개의 학당을 두고 전체 학령기 소년들의 13.2% 정도를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동인도회사]]는 정부의 입김이 확실하게 들어간 공공 학교들을 세우면서 이들로 하여금 선교사들의 학교를 몰아내게 만들었다. 동인도회사 주도의 학교들은 주로 [[영어]]와 기본적인 [[산수]]를 가르치면서 기초적인 초등교육 수준에 중점을 두고 인도인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커리큘럼들이 지나치게 암기식 위주의 수업이었다. 실생활에 정말 필요한 것이 아니면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주된 목적 자체가 [[민족말살정책|인도 고유의 언어를 몰아내고 영어가 그 자리를 대체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이같은 교육 정책은 효과를 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힌두교]]도나 [[무슬림]], [[페르시아인]]들 모두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서 소통하기 시작했으며, 이같은 경향은 현재까지도 이어 내려오고 있다.[* [[인도]]는 하나의 민족국가라기보다는 [[인도 아대륙|하나의 대륙]]을 묶은 것에 가깝기 때문에, 수백 개에 달하는 언어들이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그렇기에 같은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소통이 불가하니 어쩔 수 없이 모두가 할 줄 아는 [[영어]]를 쓰는 것이다. 특히 인도의 언어는 카스트의 영향도 묻어져 있어서 하위 카스트는 무조건 상위 카스트를 존대하는 말을 해야 하는데 영어는 그런게 없어서 하위 카스트 중에서는 일부러 영어를 하는 사람도 있다고.] 고등교육 기관인 대학도 설치했다. 주로 상류층들의 자녀가 대상이었으며,[* 다만 나중에 예산이 증가하자 중산층 자녀들도 입학하였다.] 모든 수업은 [[영어]]로만 진행했다. 1890년 경에는 약 6만 명 정도의 인도인 대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중의 3분의 1은 졸업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3분의 1 가량은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은 대학을 통해서 식민통치에 필수적인 고급행정인력들을 만들어낼 수 있었고, 1890년대 당시 인도의 중급 공무원들 중에 45% 가량이 힌두교도 인도인 출신일 정도로 사회적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고급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백인 출신 영국인들 밖에 없었다. 특히 대부분이 [[옥스브리지]] 출신으로 이들끼리 고위직이나 요직들을 돌려먹었다. 인도 제국은 1880년대에 4개의 종합대학과 67개의 단과대학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점차 대학교육 규모를 확장시켜나갔고, 1945년에 인도에는 무려 21개의 종합대학과 496개의 단과대학이 운영중이었다. 이같은 대학들은 의도치 않게 [[마하트마 간디]], [[자와할랄 네루]], [[모하마드 진나]] 등 후에 인도 [[독립운동]]의 핵심인물들을 키워내는 학문적 산실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한 독립 이후에도 나름 오래된 역사와 수준높은 교수진들 덕택에 현재까지도 인도 학문연구의 중심지로 오랫동안 남아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